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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가 절반이 넘어가는데 친구들이 흔하게 릴레이하고 있는 '내 인생에 영향을 끼친 책 10선'도 제대로 생각나는 게 없었다.
잡다하게 읽고, 딱히 완독에 의미를 두지 않는 성격이라 더더욱 그렇지만, 기억을 탈탈 털어 보니 여기까진 적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10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군복무 시절을 제하면 정말 더럽게 책하고 담을 쌓고 있었다.
릴레이 돌기 시작할 때 준비해 놓았더니 그나마 후배 한 사람에게 지목되어 올릴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facebook과 블로그의 말투를 다르게 하는 것도 가끔은 귀찮은 일. 그래도 바꾸어 올린다.

01. E=mc² - 데이비드 보더니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접했던 것 같다. 직접 구입하진 않았었고, 아마 이게 다 누나 때문일 터.
  과학사라는 것도 가끔씩은 막장드라마보다는 역동적이다. 덕분에 본래 골방에서 나무나 깎았으면,
  혹은 한자와 씨름하며 사료나 팠으면 퍽 좋았을 팔자가 이래저래 치여서 공학을 한다.
  그러고 보니, 저걸 읽고도 순수과학 말고 공학을 배우는 건 필자가 순전히 잘못 읽어서 그럴 터 (?)

02. 과학학습만화 40권 전집 - 금성출판사
  그 외에 이름을 기억할 수 없는, 어릴 때 잡아 읽었던 여러 학습만화와 가벼운 환경보호에 대한 서적들까지 포함해서.
  아마 보험 같은 것과 끼워팔기 같은 것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어머니께서는 드래곤볼이나 동화전집 말고 이런 걸 들여놓으셨고,
  덕분에 자제분들을 전부 이과로 보내셨다. 해서 석유는 (언제나) 30년 후에 고갈된다, 환경보호는 옳다,
  뭐 이런 가치들을 무슨 하나님처럼 믿었다. 돌이켜보면 동화는 또래들보다 정말 안 읽었으니, 뭐 이런 싸이코패스 개초딩을 봤나.

03. 전쟁과 과학, 그 야합의 역사 - 어니스트 볼크먼
  지금의 부전공이자 목표인 과학기술정책에 대한 관심이 여러 군데에서 시작되긴 했지만, 굳이 책으로 찾자면
  (이공계 위기라는 뉴스라던지, 교육청에서 수학경시대회는 냅두고 과학경시대회를 없애서 비분강개한다던가, 이런 게 '책'은 아닐 터)
  여기쯤 될 것이다. 과학이 무조건 세상을 발전시킨다는 환상을 넘어가야 한다. 그럼 발전의 의미란 무엇이길래.

04. 흑산 - 김훈
  우습게도 그 때 백일휴가를 나왔던 필자는 이등병 달고 갇혀 있는 신세를 진지하게, 그것도 아주 진지하게
  흑산에 유배당한 정약전에 감정이입했던 것 같다. 현실과 이상과 권력과 신념이 치고 박는데,
  그렇다면 같은 세상에 살아도 같지 않을 테지만 가끔은 생각이 달라서 흩어진 사람들이 생각나는.
  벙커에 박혀 있으면 가끔은 섬에 유배당한 기분이 나곤 했다.

05. 지식인의 표상 - 에드워드 사이드
  사실 별다른 인문학적 베이스 없이 읽어내려가기엔 지나치게 난감한 책들 중 하나.
  상병 말쯤에 허세가 돋아올라 구입했고, 그나마 글이 쉽고 얇아서 일독하긴 했지만 소화에는 몇 년이 걸릴 그런 책이다.
  일단 지금은, 어떤 자세로 지식을 쌓아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의 예시가 되어 있다.

06. 사진에 관하여 - 수전 손택
  해서 4위부터 6위까지는 군복무 시절 읽은 것들이다.
  본문에서는 예전에는 사람들이 윈체스터를 들고 설치다가 요즘(1970년대)은 핫셀블라드를 들고 설친다고 하는데,
  그럼 입대 전의 필자는 소니와 올림푸스를 들고 설쳤냐 싶어졌다. 이후로 모델사진을 그리 좋아하지 않게 된 효과(?)가 있었다.

07. 먼나라 이웃나라(구판 6권 전집) - 이원복
  흔히 연애를 글로 배우면 맹렬하게 비판을 받던데, 필자는 어려서 물건너 세상을 볼 사정이 못 되어서
  세상이 넓다는 것마저도 글로 배웠다. 우물 속에 깊이 앉아서 세상을 보면 시야가 좁아지니 우물 안 개구리라 하는데,
  책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꼭 직진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보면 오류와 편견투성이일 흔한 학습만화에 대한 감상은, 일단 그렇다.

08. 수호전 - 시내암
  물론 반지의 제왕이니 삼국지니 다들 '읽었어야' 하는 것들도 챙겨 읽긴 했다.
  (마법사가 되기 싫어서 해리포터는 안 보았지만, 웬지 될 것 같다.) 각설하고, 수호전에 비하면 막장드라마 따위는 온건할 뿐이지 않는가?
  108개의 별의 환생이고 나발이고 완전 깡패 사기꾼 도적 식인자들이 정부에 맞서 깽판을 치는 이야기 아닌가.
  마왕에게서 세상을 구하느니 천하를 통일하느니 알 게 뭐야. 그래서 개인적으로 반지의 제왕이나 삼국지보다 재미있었는지도 모르겠다.

09. 거꾸로 읽는 세계사 - 유시민
  어른들이 기술하여 가르치는 세계에 처음으로 물음표를 던지게 만든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무조건 삐딱하게 보면 장사가 되는 게 출판시장이라지만, 앞에서뿐만 아니라 옆구리도, 등짝도 볼 수 있다는 걸 아는 건 좋지 않은가?

10. 독학자 - 배수아
  80년대 학번들에게도 젋음과 고민과 환멸이 있었을 것이다. 필자의 부모님은 번듯한 학번이 없으시지만,
  동급생들의 부모들은 대부분 그 시대 학번들을 부모님으로 겪었었다. 필자의 아버지께서는 '사'를 달고 싶으셨지만 '자'를 다신 분이라,
  늘 그 학번들을 부러워하셔 대학에 대한 많은 환상을 심어주셨다.
  때문에 대학에서 참 많이 환멸했지만, 차마 그 이야기를 가족에게는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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